126년(인종 4) 발생한 이자겸의 난은 고려 왕실의 외척이었던 경원 이씨(인주 이씨) 가문이 왕권을 찬탈하려 한 대표적인 문벌 귀족의 반란이다.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은 70대였다.
-사건의 배경과 전개-
경원 이씨 가문은 문종 이후 7대 80여 년간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특히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예종의 비로 들인 데 이어, 외손자인 인종에게도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강제로 출가시켜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기형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이자겸은 사저를 의친궁이라 부르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하는 등 국왕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쳤으며,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 고기가 수만 근씩 썩어 나갈 정도로 극도의 사치를 일삼았다.
1126년 2월,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지녹연 등 측근 세력을 동원해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했다. 이에 이자겸은 당대 최고의 무장인 척준경의 군사력을 빌려 반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척준경의 군대가 궁궐에 불을 질러 연경궁 등 주요 전각이 소실되었고, 인종은 이자겸의 사저인 중흥택에 유폐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자겸은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을 믿고 인종을 독살하려 시도하는 등 왕위 찬탈을 본격화했다.
-사건의 수습과 역사적 영향-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의 틈을 이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내의소감 최사전을 통해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과 갈라서게 만들었으며, 1126년 5월 척준경이 이자겸 일파를 체포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어 그해 12월 사망했고, 공을 세웠던 척준경 또한 이듬해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실각했다.
이 사건으로 80여 년간 지속된 경원 이씨의 세도 정치는 종결되었으나, 고려 귀족 사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궁궐이 소실되고 왕권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으며, 이는 훗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