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을 한 번 보기 위해 일본 사신이 신라왕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한 금의 액수

만파식적을 한 번 보기 위해 일본 사신이 신라왕에게 바치겠다고 제안한 금의 액수

1,000
2026년 3월 20일출제 횟수: 2정답률: 100%
📜 역사/한국사
✏️편집자
신라 신문왕 대에 동해의 용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전설상의 피리로, 국가의 환란을 잠재우는 신물로 여겨졌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이 피리의 영험함은 인근 국가인 일본에까지 알려져 외교적 갈등과 회유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신라 원성왕 재위기인 786년과 787년에 일본 사신이 방문하여 만파식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786년 일본왕 문경은 신라를 침공하려 했으나 만파식적의 존재를 전해 듣고 군사를 돌렸으며, 대신 금 50냥을 보내 피리를 청하였다. 그러나 원성왕은 피리의 행방을 모른다며 거절하였다. 이듬해인 787년 7월 7일, 일본은 다시 사신을 보내 금 1,000냥을 바칠 테니 피리를 한 번 보기만 하고 돌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는 당시로서 파격적인 액수였으나, 원성왕은 이전과 같은 이유로 거절하고 대신 사신에게 은 3,000냥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후 원성왕은 만파식적을 내황전에 보관하며 국가적 보물로 관리하였다. 참고로 금 1냥은 약 37.5g. 오늘날의 금 시세로 환산하면 약 45억 원이 넘으며, 당시 물가 가치로 따지면 1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조선 시대에는 경주 객사인 동경관에 보관되던 '신라옥적'을 만파식적과 동일시하여 신성시하였다. 이 옥피리는 조령(문경새재)을 넘어가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어 경주 밖으로 반출되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인 1909년 일본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에 의해 경성으로 반출되었다가 1923년 경주 주민들의 강력한 반환 요구로 다시 경주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실학자 정약용은 피리가 경주 밖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전설에 대해, 특이한 구조를 가진 피리 연주법에 익숙지 않은 타지 사람들의 서툰 솜씨와 보물을 지키려는 경주 사람들의 의도가 결합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