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삼보(신라 왕실의 권위와 신성함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중 신인(神人)의 건의를 받아 선덕여왕에게 건립을 제안하며 시작되었다. 《삼국유사》 탑상편 황룡사구층탑 조에 따르면 자장은 불력으로 인근 국가의 침범을 막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의 높이는 《삼국유사》와 《황룡사찰주본기》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철반 이상의 상륜부는 42척이며 그 이하 탑신부는 183척으로 전체 높이는 225척이다. 이 수치를 건립 당시 통용되던 고려척(약 35cm)으로 환산하면 약 80m에 달하며, 이는 당시 동아시아 목조 건축물 중 최대 규모 수준이다.
현대 아파트 층수로 환산하면 약 25층에서 30층 사이의 고층 아파트 높이와 맞먹는다.
현대 아파트와 비교했을 때 유독 높게 느껴지는 이유는 층수와 층고의 개념이 현대 건축물과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목탑의 1층 높이가 압도적이다. 발굴 조사 결과 황룡사 목탑의 1층 바닥 면적은 약 500제곱미터(150평)에 달하며, 기둥 하나의 높이만으로도 일반 아파트 몇 층 높이를 상회하는 거대 구조였다.
둘째, 상륜부의 존재이다. 기록상 전체 높이 225척 중 탑신부(실제 층수가 있는 몸체)는 183척(약 65m)이며, 그 위에 올라가는 금속 장식인 상륜부가 42척(약 15m)을 차지한다. 즉, 건물 꼭대기에 아파트 5층 높이의 거대한 안테나나 첨탑이 추가로 붙어 있는 셈이다.
셋째, 고대 건축의 비례미이다. 목탑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체감률을 적용하면서도 각 층의 옥개석(지붕) 두께와 층간 간격을 웅장하게 설계했기에, 현대의 효율 중심적인 아파트 층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직적 규모를 갖게 되었다.
이 탑은 고려 시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서기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와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는 경주 황룡사지에 그 터와 거대한 심초석 및 초석들만이 남아 당시의 규모를 증명하고 있다.